좁은 복도에서 스치기만 했는데 “아, 미안해요”가 먼저 나오고, 질문 하나를 하면서도 “미안한데”로 말을 시작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자꾸 먼저 나올 때,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지나치게 소심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버릇 뒤에는 꽤 이유 있는 마음의 기준이 숨어 있습니다.
요약: 미안하다는 말이 자꾸 먼저 나오는 것은 사과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는 기준, 즉 문턱이 낮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 문턱을 알아차리면 말버릇을 억지로 누르지 않고도 조금씩 바꿔볼 수 있습니다.
사과의 문턱이 낮으면 사과가 먼저 나옵니다
심리학자 카리나 슈만(Karina Schumann)과 마이클 로스(Michael Ross)는 2010년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한 연구에서, 사람마다 ‘이건 사과해야 할 잘못’이라고 느끼는 기준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사과를 더 자주 하는 사람들은 사과할 의지가 더 큰 것이라기보다, 같은 상황을 더 쉽게 ‘사과가 필요한 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자꾸 먼저 나온다면, 말이 많은 것이 아니라 문턱이 낮은 것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출처: Schumann & Ross (2010), Why Women Apologize More Than Men, Psychological Science.

미안하다는 말에는 여러 뜻이 섞여 있습니다
“미안한데 잠깐만요”에서의 미안함은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가 아니라, 말을 꺼내기 전의 완충 장치에 가깝습니다. 길을 비켜달라는 말, 양해를 구하는 말, 그냥 건네는 인사까지 모두 ‘미안’이라는 한 단어에 담기기 쉽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사과인지 완충인지 구분해보면, 정작 사과해야 할 순간이 더 분명해집니다.
말하기 전에 확인해보는 한 가지 질문
입에서 “미안”이 나오려 할 때, 마음속으로 ‘내가 지금 누구에게 실제로 피해를 주었나’ 하고 한 번만 물어보세요. 답이 ‘아니오’라면 그 자리에는 다른 말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매번 이 질문을 거칠 필요는 없습니다. 하루에 한두 번만 떠올려도 말버릇이 스스로 어디서 나오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미안해 대신 쓸 수 있는 말
기다려주었다면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알려주었다면 “알려줘서 고마워요”, 질문을 하려는 거라면 “잠깐 확인해도 될까요”가 훨씬 정확한 말입니다. 같은 상황을 사과 대신 감사나 요청으로 바꾸면, 상대는 불편을 끼쳤다는 말 대신 고마움을 전해 받게 됩니다. 말을 바꾸는 것만으로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진짜 사과가 필요한 순간은 분명하게
사과를 줄이자는 것은 사과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약속을 어겼거나 상대를 서운하게 했다면 사과는 분명하게 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때는 “미안해” 한마디로 넘기기보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기다리게 했어, 미안해”처럼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한 문장을 덧붙이면 사과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사과가 먼저 나오는 이유를 들여다보기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마음속에는 갈등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상대의 눈치를 먼저 읽는 습관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과가 긴장을 낮추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오래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고, 다만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선택지가 넓어집니다.
한 번에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버릇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 ‘미안’ 대신 다른 말을 써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입에서 먼저 나와버렸다면 그것도 그대로 괜찮습니다. 나중에 ‘아까는 이렇게 말해도 됐겠구나’ 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음번에 말이 달라질 가능성이 생깁니다.
상대가 자주 사과할 때 건넬 수 있는 말
가까운 사람이 사소한 일에도 자주 미안하다고 한다면 “사과할 일 아니에요” 혹은 “괜찮아요, 편하게 말해요”라고 가볍게 답해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사과를 받아주는 말보다 사과가 필요 없었다고 알려주는 말이, 상대가 문턱을 조금 높이는 데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일터에서의 미안하다는 말
회의나 메신저에서는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하는 말이 특히 많아집니다. 하지만 요청이나 질문을 사과로 포장하면 내용보다 미안함이 먼저 전달되고, 듣는 사람도 무언가 큰 잘못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처럼 용건만 담백하게 건네도 예의는 충분히 지켜집니다.
몸에 밴 말버릇은 어릴 때부터 쌓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 분위기를 살피는 일이 중요했던 사람일수록 사과가 먼저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격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래 쓰던 방법이 몸에 남아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 방법이 한때 나를 지켜주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금은 다른 말도 써볼 수 있다는 여유가 생깁니다.
사과를 아끼는 것이 차가운 것은 아닙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줄이면 무뚝뚝해 보일까 걱정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마움과 관심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오히려 따뜻함이 잘 전달됩니다. 사과를 덜 쓰는 대신 감사와 안부를 더 쓰는 것이,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다른 길이 되어줍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자꾸 먼저 나올 때에 대해 조금 더
미안하다는 말이 자꾸 먼저 나올 때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부탁하는 게 어려운 사람을 위한 말 글도 참고해보세요.
이 주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사과(apology) 관련 자료도 참고할 만합니다.
단호하게 표현하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방법은 영국 NHS의 Raising low self-esteem(영문)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이며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